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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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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역사

고대하던 해방은 맞았으나, 과도기의 무질서와 혼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운데, 

전재 동포들은 만주에서 일본에서 물밀듯이 돌아 왔다. 

건국 사업에 협력하는 첫 길은 귀환 전재 동포의 구호라고 생각하신 

정산 종법사는 원의(院議)의 찬동을 얻어, 원기 30년(1945·乙酉) 9월 4일 이리 역전과, 

9월 10일 서울 역전에 [귀환 전재 동포 구호소]를 설치하게 하여, 

서울에서는 6개월 반 동안, 이리에서는 13개월 반 동안,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어 방황하는 

전재 동포들에게 식사 의복의 공급과 숙소 안내, 응급 치료와 분만 보조 및 

사망자 치상(治喪) 등으로 자비의 손길을 뻗치게 하시었다.
구호 사업은, 총부 간부 일부와 청년 임원들이 동원되어 주로 지휘에 당하고, 

20 여개 지방의 교도들이 자진 동원하여 1주일씩 교대로 노력한 바, 

그 알뜰한 활동은 당시 모든 구호 단체의 사표가 되었고, 

일반 사회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부산에서도 3개월, 

전주에서도 5개월 동안 부(府) 당국의 구호 사업에 재가 출가의 많은 인원이 

동원하여  적극 협력하였다. 당년도 사업보고에 의하면 4개 지구의 구호소에서 

구호 받은 동포수가 80 여만명, 구호에 동원된 교도 수가 5백 여명, 

교도 동원 연 일수(延日數)가 1만 3천 여일, 동원 대신 노임 제공과, 

동원에 따른 제반 비용이 상당액(약 1백2십만원)에 달하였다. 

이 때 서울 구호소에서는 [허영의 생활을 안분의 생활로, 

원망의 생활을 감사의 생활로!] 등 교강(敎綱)의 정신으로 작성한 전단(傳單) 

수 십만매(枚)를 구호 받는 동포들에게 돌렸고, 귀환 학병들을 위한 사상 강연회를 

주최하였으며, 한남동 정각사(漢南洞正覺寺)에 수 많은 전재 고아를 수용, 

서울 보화원(초대원장黃淨信行)을 발족시킴으로써 새 회상 자선 사업 기관의 

효시를 이루었고, 수위단 중앙 단원 송 도성은 구호 중 전염병으로 마침내 순직하였다.
한 편으로는, 종전의 총부 야학원을 개방하여 구내 아동들에게 한글을 교육하고, 

이듬해(원기31·1946) 1월, 교무 강습회에 한글 학회 강사를 초청하여 교육을 받아, 

전국 교당에서 일제히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한 바, 수강생이 도합 4천여명에 달하였다. 

또한, 총부 서울 간에 연락할 사항이 빈번해 짐에 따라 정각사에 총부 출장소(초대소장金大擧)를 

병설하여 대외 교섭, 방송 교화, 서울 교구의 지도 등에 당하게 하였으며, 

한 편으로는 서울 용산의 용광사(龍光寺), 부산 서정(釜山西町)의 신사, 

이리 동산동의 신사 터 등 귀속 재산을 불하 받아, 서울 지부·경남 지부·이리 지부로 각각 발전시켰다.
이 때(1945년10월)에 정산 종법사는 [건국론]을 지어, 시국에 대한 소감을 밝히시니, 

그 요지는 정신으로써 근본을 삼고, 정치와 교육으로써 줄기를 삼고, 

방 건설 경제로써 가지와 잎을 삼고, 진화의 도로써 그 결과를 얻어서, 

영원한 세상에 뿌리 깊은 국력을 잘 배양하자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