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 40년(1955·乙未) 1월, 교무 연합회에서 중앙 직할 3대 선원 설립이 공고되었다.
이는, 원기 38년(1953·癸巳) 6월에 설립된 이리 고등선원을 동산선원으로,
그 동안의 총부 선원을 중앙 선원으로, 영산 학원을 영산 선원으로 각각 발전시키되,
이 3대 선원을 중앙 직할 선원으로 하여 장차 새 회상 교역자 양성의 본거를 삼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산 선원은 고등선원 교감 이 운권을 초대 원장으로 발령,
그 해 3월에 제 1회 수료생을 내고, 그 후 조 전권·안 이정(安理正)이 원장의 대(代)를 이어,
매년 수선(修禪)을 계속, 원광 대학 교학과와 함께 새 회상 교역자 배출의 쌍벽을 이루었다.
중앙 선원은 동산 선원장(李雲捲)을 초대 원장으로 겸임 발령하여 종전 제도로 지내오다가,
42년(1957·丁酉)에 이 완철을 전임(專任) 원장으로 발령하여, 그 해 11월 6일 첫 결제식을 가졌다.
그러나, 어려워진 교단 경제 아래 자체의 유지 토대가 확립되지 못하여,
휴원·재개원을 거듭하다가, 한 동안 동산 선원과 병합 운영도 하고,
54년(1969·己酉)부터는 총부 구내 상주선원(常住禪院)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그 후 중앙 훈련원으로 발전하였다.
영산 선원은 전재 복구와 재방언 등 관계로 쉽게 발족을 보지 못하다가
47년(1962·壬寅)에 우선 영산지부에서 학원 제도 형식을 복구하였고,
49년(1964·甲辰) 3월에 초대 원장 안 이정을 임명, 중등·고등 2부 편제의
초등 선원으로 개원하여 정관평 작농도 겸한 선농 일치 교육을 실시,
54년(1969·己酉)에 2대 원장 오 종태가 단일 편제로 상급 선원 진학의 길을
계속 열어 주어, 교역자 육성에 기여하였다.
한 편, 원기 42년(1957·丁酉) 4월에 원불교 장학회가 발족하였다.
회상 초기부터 꾸준히 염원되어 온 교단 인재 양성의 꿈은,
원기 12년(1927·丁卯)에 육영부 창립단 활동이 시작되고,
19년(1934·甲戌)의 새 회규는 십부 중 육영부를 두어 기금 육성을 전담케 하였으나,
시국 관계로 소기의 재단이 이루어 지지않자, 27년(1942·壬午),
부서에서 제외되었다가, 그 후 학교와 선원들의 교역자 양성 작업이 차차 진전되자,
이에 이르러 장학회를 발족하고, 이어, 교헌 개정(원기44·1959)으로
육영부(부장·徐大仁)를 부활시켜 육영 장학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게 하였다.
정산 종법사는 장학회 치사에서 [초(楚)나라는 오직 어진 이를 보배 삼았다 하거니와,
우리는 오직 철저한 신심과 알뜰한 공심 가진 혈성 동지들을 기르고
또 길러서 우리의 무궁한 사업에 실다운 보배를 삼고 자산을 삼자] 하시었다.
또한, 43년(1958·戊戌)에 목포 김 현관(金玄觀)은 육영 사업을 발원,
연차 계획으로 수계 농원에 상당 규모의 인삼 재배를 실시하여,
46년(1961·辛丑) 5월에 은산 육영재단을 설립하였고,
그 해 10월에 원불교 육영재단 정관을 제정, 11월 부터 거교적인 장학회원 모집 운동을 일으키어,
상당한 재단이 형성되자, 47년(1962·壬寅) 5월에 육영재단 이사회(이사장·文東賢)를 구성하여
교단 만년 대계인 육영 장학을 계속 뒷받침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