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일찍부터 새 회상 창립의 준비를 위한 휴양처를 물색하시어,
원기 4년(1919·己未) 3월에 오 창건을 데리시고 전라북도 부안 봉래산
(全羅北道 扶安郡 蓬萊山 本名邊山) 월명암(月明庵)에서 10여일 유하신 후 돌아 오시고,
7월 말에는 다시 송 규를 보내시어 미래의 근거를 정하게 하시더니,
10월에 이르러 조합의 뒷일을 여러 사람에게 각각 부탁하시고,
몇 해 동안 수양하실 계획 아래 월명암에 행차 하시었다.
대종사, 서해연변을 돌아 월명암에 오시니, 오랫동안 고대하던 송 규는 환희 용약하였고
백 학명(白鶴鳴) 주지도 반가이 영접하였다.
대종사의 입산 동기는, 다년간 복잡하던 정신을 휴양하시며, 회상 창립의 교리 제도를 초안하시고,
사방 인연을 연락하여 회상 공개를 준비하시며, 험난한 시국에 중인의 지목을 피하시기 위함이었다.
한 편 대종사, 이 해(1919·己未) 8월에 휴양처를 물색차, 김제 금산사에 가시어 잠시 머무는 동안,
거처 하시던 별채 문미(門楣)에 일원상을 그리신 바 있었으니, 이는 장차 새 교법의 종지(宗旨)인
일원상을 그림으로 그려 보신 첫 구상의 표현이었다.
대종사, 월명암에 계실 제, 전주 김제 등지에서 송적벽(宋赤壁) 등(별록2)이 달려와
모시기를 원하는 지라, 그 해(원기4년·1919) 12월,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 옆 몇 간 초당에
거처를 정하시고, 몇 몇 제자(별록3)로 더불어 간고한 살림을 하시면서 심신의 휴양에 주력하시었다.
그러나, 새 해(원기5년·1920)부터 영광·김제·전주 등지의 신자들이 은연 중 서로 소식을 통하여
그 심산 궁곡에 찾아 오는 사람이 차차 많아지는 지라, 대종사, 그들의 정성에 감응하시어,
매양 흔연 영접하시며 조석으로 설법하시니, 당시의 법설 요지는 대개 관심 입정(觀心入定)과
견성 성불하는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