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 8년(1923·癸亥) 6월에 서 중안이 부인 정세월(鄭世月)과 함께 다시 봉래 정사에 와서
사뢰기를 [이 곳은 길이 험난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장소가 협착하오니 마땅히 교통과 장소가
편리한 곳을 택하여, 모든 사람의 앞길을 널리 열어 주심이 시대의 급무일까 하나이다] 하며,
대종사의 하산(下山)을 지성으로 간청하였다.
대종사, 그의 말에 응하사 장차 정식 회상 열 계획을 함께 의논하시더니, 때마침 영광으로 부터
모친의 병보가 온지라, 겨울에 만날 것을 약속하시고, 급거 본댁에 가시어,
7월에 모친 상사(喪事)를 당하시었다. 이 때에 각지 신자들이 문상 차 영광에 많이 모이니,
옥녀봉 도실은 너무 비좁아 대중을 수용하기가 심히 불편하고, 또는 기지가 비습(卑濕)하여
영원한 교당 위치로는 적당치 아니하므로, 이에 교당의 이축을 발론하시어,
드디어 범현동 기슭에 새 터를 정하고 목조 초가 10간(間) 1동(棟)과 8간(間) 2동(棟)의 건축을
10월에 마치니, 이것이 곧 영산원(靈山院)의 첫 건설이었다.
11월에, 대종사, 이리(朴元石집)를 거쳐 전주로 가시어, 박 호장·이 청춘(李靑春) 등이 주선한
10여간(餘間)의 집을 임시 출장소로 정하시고, 회상 공개에 관한 취지 규약의 작성 인쇄와
제반 준비를 서 중안에게 일임하신 후 봉래산에 돌아 오시었다. 대종사, 그 동안의 취지와 경과를
백 학명 주지에게 말씀하시니, 그가 크게 동감하여, 자신의 새 임지인 내장사의 일부를
빌려 드릴 터인즉 거기에서 취지를 실현해 보시라고 제의하였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사찰은 공유라, 어찌 한 두 사람의 생각대로 되리요마는,
될 수만 있다면 미래 불교계에 많은 서광(瑞光)이 될 것이라] 하시고, 우선 송 규 등 5인(별록4)을
내장사로 보내시었다.
원기 9년(1924·甲子) 2월에, 대종사, 이리 김제를 거쳐 내장사에 이르시니, 전 날의 의논은
승려들의 반대로 좌절되고, 백 학명 주지는 크게 미안히 여기는지라, 대종사 여러 모로
그를 위안하신 후, 몇 몇 제자들을 데리고 서울에 가시어 서 중안이 주선한 집(唐珠洞)에
임시 출장소를 정하시고, 한 달 동안 머무시며 여러 인연들(본장4절 기술)을 얻으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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